100년 만에 인정 받은 독립운동…보훈금 나눔까지 [광복80주년]⑥
입력 2025.08.15 (09:00)
수정 2025.08.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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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함께 독립운동하다 같은 날 숨진 어머니와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어머니는 보부상으로 위장해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전달했는데요. 이 두 모자(母子)는 순국 102년 만에야 독립운동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았습니다. 후손들은 보훈 급여를 받게 됐는데요. 그 돈이 다시 '나라'와 '지역'을 위해,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 쓰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연일까요? |

■ 일제에 항거하다 한날한시 생을 달리한 모자의 비극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 제사를 왜 같은 날 지낼까? 어릴 적 무척 궁금했어요.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두 분이 같은 날, 생을 달리했다는 말을 꺼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게다가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 분위기였던 탓에, 다들 쉬쉬했던 것 같아요." - 박명현 (독립운동가 박도철 선생 증손녀) - |
대한제국 육군이었던 박도철 선생은 해산 명령 이후, 고향인 경북 상주와 충북 제천에서 의병 투쟁을 하다 진천으로 넘어와 항일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3·1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1919년 4월 3일, 진천에도 닿았는데요.
당시 35살이었던 박도철 선생은 진천군 광혜원면에 모인 군중 2천여 명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했습니다.
일제는 해산 요구에 굴하지 않는 군중에게 총을 난사했고, 박도철 선생은 그 자리에서 작고했습니다.
박도철 선생의 어머니도 아들의 부고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항의하다 같은 날, 일제의 총탄에 희생됐습니다.

■ 순국 100년 만에 세상에 알려진 저항의 불꽃
두 모자의 비극적인 사연은 박도철 선생 순국 100년 만에야 세상 빛을 봤습니다.
충북 진천향토연구회 등 지역 역사 연구자들이 국립기록원의 3·1 운동 피살자 명부에서 박 씨의 이름을 찾은 덕분입니다.
일제 헌병대의 관련 자료와 지역의 만세운동 기념비에도 당시 기록이 남아 있어 그동안 입에서 입으로, 집안에만 전해 내려오던 선조의 독립운동 공적이 문서로 공식 확인됐습니다.
2019년 2월에는 KBS의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 우여곡절 끝에 독립운동 유공 인정
하지만 여러 사료가 발견된 뒤에도, 곧바로 서훈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후손들은 박도철 선생의 이름을 집에서 부르던 아명인 '박치선'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족보 분석과 가족관계증명서 확인 등을 여러 차례 거쳐서야 박치선, 박도철이 같은 인물이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역 역사학계의 도움으로 퍼즐 맞추듯, 자료를 더 찾아 확인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린 겁니다.
소명과 재신청을 거듭한 끝에, 박도철 선생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 100년이 지나도 변치 않고, 대를 이은 '나라 사랑'
순국 102년 만에 박도철 선생이 독립운동 유공을 인정받았지만, 손자인 박영섭 씨는 마냥 기쁘기만 하진 않았습니다.
선조들이 살림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에 모두 바쳐 해방 이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박영섭 씨의 아버지, 그러니까 박도철 선생의 아들은 6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할머니를 한순간 잃으면서 더욱 궁핍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던 건데요.
고달팠던 기억은 이내, 비슷한 처지였을 이웃을 도와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 집안 어른들이 그러셨어요. '빌어먹으면 어떠냐, 나라가 없는데 돈이 있으면 다 무슨 소용이냐'.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피와 땀으로 잘살게 됐기 때문에 그다음 세대한테 안락함을 넘겨주는 것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또 하나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박명현 (독립운동가 박도철 선생 증손녀) - |
이에, 박도철 선생 후손들은 서훈을 받은 2021년부터 박도철 선생의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였던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에 보훈 급여를 모아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진천 지역 장학회와 만세운동 기념탑 건설 비용 등에 낸 돈이 1,000만 원을 훌쩍 넘는데요.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위해 써달라면서 한 대학에 1,500만 원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남은 소원은 단 하나인데요.
광복 80년이 되도록 잠들어있는 독립운동가를 모두 찾아내 업적을 기리고, 그 후손들이 자긍심을 갖고 사는 겁니다.
무장한 일제에 결연하게 맞서던 선조의 얼이 주변 이웃과 미래 세대를 위한 선행으로, 나라 사랑의 마음이 변치 않고 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3·1운동 중 숨진 모자의 비극…‘100년의 한’ 풀릴까?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146480)
102년 만에 독립유공 서훈 인정…“사료 발굴 지원 절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128924)
촬영기자 김현기 / 그래픽 조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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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만에 인정 받은 독립운동…보훈금 나눔까지 [광복80주년]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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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8-15 09:00:18
- 수정2025-08-15 09:28:26

일제 강점기에 함께 독립운동하다 같은 날 숨진 어머니와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어머니는 보부상으로 위장해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전달했는데요. 이 두 모자(母子)는 순국 102년 만에야 독립운동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았습니다. 후손들은 보훈 급여를 받게 됐는데요. 그 돈이 다시 '나라'와 '지역'을 위해,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 쓰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연일까요? |

■ 일제에 항거하다 한날한시 생을 달리한 모자의 비극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 제사를 왜 같은 날 지낼까? 어릴 적 무척 궁금했어요.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두 분이 같은 날, 생을 달리했다는 말을 꺼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게다가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 분위기였던 탓에, 다들 쉬쉬했던 것 같아요." - 박명현 (독립운동가 박도철 선생 증손녀) - |
대한제국 육군이었던 박도철 선생은 해산 명령 이후, 고향인 경북 상주와 충북 제천에서 의병 투쟁을 하다 진천으로 넘어와 항일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3·1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1919년 4월 3일, 진천에도 닿았는데요.
당시 35살이었던 박도철 선생은 진천군 광혜원면에 모인 군중 2천여 명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했습니다.
일제는 해산 요구에 굴하지 않는 군중에게 총을 난사했고, 박도철 선생은 그 자리에서 작고했습니다.
박도철 선생의 어머니도 아들의 부고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항의하다 같은 날, 일제의 총탄에 희생됐습니다.

■ 순국 100년 만에 세상에 알려진 저항의 불꽃
두 모자의 비극적인 사연은 박도철 선생 순국 100년 만에야 세상 빛을 봤습니다.
충북 진천향토연구회 등 지역 역사 연구자들이 국립기록원의 3·1 운동 피살자 명부에서 박 씨의 이름을 찾은 덕분입니다.
일제 헌병대의 관련 자료와 지역의 만세운동 기념비에도 당시 기록이 남아 있어 그동안 입에서 입으로, 집안에만 전해 내려오던 선조의 독립운동 공적이 문서로 공식 확인됐습니다.
2019년 2월에는 KBS의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 우여곡절 끝에 독립운동 유공 인정
하지만 여러 사료가 발견된 뒤에도, 곧바로 서훈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후손들은 박도철 선생의 이름을 집에서 부르던 아명인 '박치선'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족보 분석과 가족관계증명서 확인 등을 여러 차례 거쳐서야 박치선, 박도철이 같은 인물이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역 역사학계의 도움으로 퍼즐 맞추듯, 자료를 더 찾아 확인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린 겁니다.
소명과 재신청을 거듭한 끝에, 박도철 선생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 100년이 지나도 변치 않고, 대를 이은 '나라 사랑'
순국 102년 만에 박도철 선생이 독립운동 유공을 인정받았지만, 손자인 박영섭 씨는 마냥 기쁘기만 하진 않았습니다.
선조들이 살림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에 모두 바쳐 해방 이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박영섭 씨의 아버지, 그러니까 박도철 선생의 아들은 6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할머니를 한순간 잃으면서 더욱 궁핍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던 건데요.
고달팠던 기억은 이내, 비슷한 처지였을 이웃을 도와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 집안 어른들이 그러셨어요. '빌어먹으면 어떠냐, 나라가 없는데 돈이 있으면 다 무슨 소용이냐'.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피와 땀으로 잘살게 됐기 때문에 그다음 세대한테 안락함을 넘겨주는 것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또 하나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박명현 (독립운동가 박도철 선생 증손녀) - |
이에, 박도철 선생 후손들은 서훈을 받은 2021년부터 박도철 선생의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였던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에 보훈 급여를 모아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진천 지역 장학회와 만세운동 기념탑 건설 비용 등에 낸 돈이 1,000만 원을 훌쩍 넘는데요.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위해 써달라면서 한 대학에 1,500만 원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남은 소원은 단 하나인데요.
광복 80년이 되도록 잠들어있는 독립운동가를 모두 찾아내 업적을 기리고, 그 후손들이 자긍심을 갖고 사는 겁니다.
무장한 일제에 결연하게 맞서던 선조의 얼이 주변 이웃과 미래 세대를 위한 선행으로, 나라 사랑의 마음이 변치 않고 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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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146480)
102년 만에 독립유공 서훈 인정…“사료 발굴 지원 절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128924)
촬영기자 김현기 / 그래픽 조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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